한때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곧 운명이라고 믿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에 인간의 모든 특성과 질병의 가능성, 성격, 능력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이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변하지 않지만, 유전자가 활성화되거나 억제되는 방식은 환경과 생활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이처럼 유전자의 표현을 조절하는 작용을 후성유전학이라 부르며, 오늘날 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이번 글에서는 후침묵하는 유전자들의 반란? — 후성유전학의 역설을 탐구하기 위해 유전자와 운명은 다르다 — 후성유전학의 등장 배경, 환경이 유전자를 조절한다 — 후성적 변화의 원인과 영향, 후성유전은 유전될 수 있는가? — 세대 간 영향의 과학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유전자와 운명은 다르다 — 후성유전학의 등장 배경
전통적인 유전학은 DNA에 담긴 염기서열이 단백질을 만들어 생명체의 모든 기능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이론으로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도 다른 특성을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예가 일란성 쌍둥이다. 이들은 동일한 유전 정보를 공유하지만,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 성격, 건강 상태, 심지어 질병 발생률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후성유전학은 DNA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유전자의 작동 여부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즉, 유전자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켜질지 꺼질지, 강하게 작동할지 약하게 작동할지를 후성적 요소가 결정한다.
대표적인 후성적 조절 방식에는 DNA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이 있다. DNA 메틸화는 특정 유전자 부위에 메틸기라는 화학 그룹이 붙으면서 그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되는 현상이다. 반면 히스톤 변형은 DNA가 감겨 있는 단백질 구조가 느슨해지거나 조여짐에 따라 유전자의 접근성과 발현 가능성이 달라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용은 유전 정보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 세포나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만든다. 즉, 유전자는 조용히 존재하되, 그 침묵이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이다.
환경이 유전자를 조절한다 — 후성적 변화의 원인과 영향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 경험하는 스트레스, 노출되는 화학물질, 운동, 수면, 심지어 감정 상태까지도 후성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최근의 과학적 발견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의 방식은 단순히 생활습관 차원에 그치지 않고, 유전자 활동을 직접 조절하는 생물학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영양 상태가 후성유전을 유도하는 대표적 요인이다. 임신 중 영양 결핍을 경험한 산모의 아이는 태어나서도 대사 질환이나 심혈관 질환에 취약할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출생 당시 체중 때문이 아니라 태아 시기에 이미 유전자의 발현 패턴이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성적 변화는 단기적 반응을 넘어서 장기적인 건강 상태와 질병 위험까지 좌우할 수 있다.
스트레스 또한 중요한 후성적 요인이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특정 유전자의 메틸화를 증가시키며, 이는 우울증, 불안 장애, 심지어 자살 충동과 같은 정신질환과도 관련된다는 연구들이 있다. 반대로 운동이나 명상, 충분한 수면은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거나 정상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처럼 후성유전학은 유전이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따라 변화 가능한 가능성의 체계임을 보여준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환경을 선택하고 어떤 행동을 반복하느냐가 유전자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후성유전은 유전될 수 있는가? — 세대 간 영향의 과학
더욱 놀라운 사실은 후성적 변화가 자식 세대로까지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후성유전학이 단순히 개인의 생애에 국한되지 않고, 세대 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한 세대가 경험한 환경이 다음 세대의 유전자 발현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세계대전 당시 식량난을 겪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비만, 당뇨, 심장 질환의 발생률이 높았다는 연구 결과다. 이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부모 세대의 영양 결핍 경험이 후성적으로 조절되어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또한 동물 실험에서도 부모 세대가 특정 자극이나 트라우마에 노출되었을 때, 그 경험이 후성적으로 조절되어 자식 세대의 뇌 구조나 행동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후성유전이 단순한 개인 내 조절이 아닌, 생물학적 기억으로써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현상이 인간에게서 어떤 범위까지 작용하는지는 여전히 연구 중이다. 후성 정보는 생식세포가 만들어질 때 대부분 초기화되지만, 일부는 초기화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후성유전이 인간 사회의 질병 양상, 건강 불균형, 심리적 특성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과학적 흥미를 넘어서 사회적, 윤리적 논의로 확장되고 있다.후성유전학은 ‘유전자는 바꿀 수 없다’는 기존의 생물학적 운명론에 커다란 반례를 제시하고 있다. 유전자 자체는 침묵하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깨우거나 다시 잠재우는 열쇠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달려 있다. 환경, 식습관, 스트레스, 감정, 수면 등은 유전자의 운명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능동적인 요인이며, 이는 우리의 건강과 후손의 삶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유전 정보를 넘어서 유전자의 표현 방식까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후성유전학은 아직 모든 비밀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생물학과 인간의 행동을 연결짓는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유전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매일의 삶 속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